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8-04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2. 취미생활/- 책

by 새치미밍 2018. 10. 1. 14:40

본문

반응형



클로이를 만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회의적 태도로 운명의 문제를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 둘 다 그때까지 미신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던 것, 즉 우리가 서로에게로 운명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무수한 사실들-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을 손에 쥐게 되었다. 우리는 둘다 짝수 해의 같은 달 자정 무렵[그녀는 오후 11시 45분, 나는 오전 1시 15분]에 태어났다. 우리 둘 다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으며, 둘 다 학교 다닐 때 「한여름 밤의 꿈」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헬레나 역이었고, 나는 테세우스의 시종 역이었다]. 우리 둘 다 왼쪽 발가락에 커다란 점이 둘 있었고, 똑같은 뒤쪽 어금니에 충치가 있었다. 우리 둘 다 햇빛이 밝은 곳으로 나가면 재채기를 했으며, 케첩 병에서 칼로 케첩을 긁어냈다. 심지어 우리의 책꽂이에는 똑같은 『안나 카레니나』[옛 옥스퍼드 판]가 있었다. 사소한 일들일지 모르지만, 이 정도면 신자들이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에 충분한 근거가 아닐까?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초콜릿을 정말 좋아해요. 어떠세요?" 클로이는 이렇게 묻더니 덧붙였다.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전에 어떤 남자를 사귄 적이 있는데, 아까 말하던 로버트라는 사람 말이에요. 나는 그 사람 하고는 한번도 편안했던 적이 없어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죠. 그러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분명해졌어요. 그 사람이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예요."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천사]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쩐 일인지 보답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우에 타인의 애정을 받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불행하게도 그런 유형의 사람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게 된 사람은 모든 거짓 아첨꾼들이 당하기 마련인 역습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또다른 마르크스(Grucho Marx, 890-1977, 미국의 희극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모순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클럽에 가입하기를 소망하면서 그것이 실현되자마자 그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어쩌면 어떤 사랑은 아름답거나 고귀한 존재와 사랑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우리를 애초에 사랑으로 몰고 간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떠면 우리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내가 사준 오렌지 스쿼시를 앞에 놓고 앉아서 이렇게 말햇따. "어떤 남자가 9시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진짜로 9시에 전화를 하면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겠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남자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남자야. 9시 30분이 되면 나는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되거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햇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따르면 연인들은 누군가를 향한 갈망과 그런 갈망을 없애고자 하는 바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이론가들은 융합을 의심해왔는데, 그것은 정당하다. 사람들은 차이를 따지는 것보다는 유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대 사이의 교차로에 주목했다. 어머니는 딸과 똑같은 방법으로 감자를 다듬었고, 작은 마늘을 빻아 버터에 넣고 그 위에 소금을 갈아 얹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일요일 신문에 대한 취향도 딸과 똑같았다. 아버지는 어슬렁거리기를 좋아했는데, 클로이 역시 걷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주말이면 나를 끌고 햄스테드히스까지 가서, 신선한 공기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야기하곤 했다. 아마 그녀의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을 것이다.


저녁에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클로이의 초기 세계와 나의 초기 세계 사이의 모든 차이가 피곤했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와 배경이 매혹적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괴상해 보였다. 나는 익숙한 환경에 대한 원시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내가 이미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 집, 부모, 역사의 특이한 점까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갈망했다.


자유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유는 다른사람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거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개인관계에 적용될 경우 밀의 지혜는 그 호소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는 것 같다. 사랑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껍질만 남은 결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각방을 쓰면서 출근하기 전에 부엌에서 만나 몇 마디 건네는 관계. 상호 이해에 대한 희망은 오래 전에 포기하고 대신 통제된 오해에 기초하여 미지근한 우정을 지속하기로 합의한 관계. 저녁에 셰퍼즈 파이를 함께 먹을 때에는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지만, 새벽 3시에는 잠을 못 이루고 감정적 좌절에 가슴 아파하는 관계.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하나의 단어에서도, 언어에 현학적인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주장이 아니라 연인들이 서로를 이해시키려는 연인들에게 간절히 중요한 하나의 단어에서도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 클로이와 나는 둘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밤에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각기 다른 데서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결국 다른 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 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나는 마치 어느 것이 가닿을지도 모르면서 허공에 수백 개의 포자를 방출하는 민들레가 된 느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 로슈푸고(La Rochefoucauld, 1613-80, 프랑스의 작가, 모럴리스트)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를 세운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5-82]는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그 만남을 묘사한 적이 있다.


 천사는 아주 아름다웠다. 얼굴에는 불이 붙은 듯하여 높은 지위에 속하는 천사처럼 보였다. 높은 천사들은 온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니까……. 그는 손에 황금 창을 쥐고 있었는데, 철로 된 창끝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는 이것으로 내 심장을 여러 번 꿰뚫어, 창은 내 내장에까지 이르렀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나는 몇 번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이 강렬한 통증에서 엄청나게 달콤한 느낌이 스며나와 나는 절대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는 내 영혼이 신외에 어떤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기에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엇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를 한 조각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 모든 선택[아무리 멋진 선택이라고 해도]에 따르는 불가피한 상실로 인한 아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늘 "지금" 그렇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클로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 말은 시간의 구속을 받는 약속이었다. 내 말은 시간에 얽매인 진술일 뿐이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하게 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현재를 즐기는 것은 불완전하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덧없는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내세에 대한 믿음 뒤에 숨는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었는지도. 


현재의 불안은 내가 코를 줄줄 흘렸거나, 목이 말랐거나, 목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 해 내내 나를 위로해주었던 미래의 가능성 하나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로프 바닥에 이르자마자 나는 산을 돌아보며 완벽한 활주였다고 혼자 되뇌었다. 스키를 타던 방학은 [일반적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도]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의 기대, 현실에서의 불안, 저녁의 유쾌한 기억.


클로이가 대표하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어려움은 거기에 이르는 인과 과정이 없다는 것, 따라서 내 삶에서 그 행복을 빚어낸 요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온다. 클로이와 나의 관계는 마치 신들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신의 보복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나는 내 방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른 인간에게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그래도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처럼 사랑하며 시간을 보냈다. 침실에서는 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가 아니라 홉스와 벤담의 추종자였다. 우리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선호에 기초해서 도덕적 판단을 했따. 홉스는 『법의 원리』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사람이란 그 기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일번적 구별에서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가톤 하플로스, 즉 그냥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클로이가 떠난 이후로 나는 인식 외에는 거의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놀라지 않는-이 말의 모든 의미에서-사람이 되었다. 




반응형

'2. 취미생활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02 인생 우화  (0) 2019.02.13
19-01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0) 2019.01.09
18-03 개인주의자 선언  (0) 2018.04.23
18-02 굿 이브닝, 펭귄  (0) 2018.04.18
18-01 거울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0) 2018.04.1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