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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알로하, 나의 엄마들

2. 취미생활/- 책

by 새치미밍 2024. 8. 2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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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은 버들개지 필 때 태어나서 버들이라고 지었다는 자기 이름이 다른 여자애들 이름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항렬을 따라 지은 남자 형제들 이름엔 가문이나 부모의 바람이 담겨 있찌만 버들이랑ㄴ 이름에는 어떤 기대나 염원도 담겨 있지 않았다.

 

버들은 에스더처럼 자신이 꿈꾸는 삶과 어울리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갖고 싶었다. 포와에 가면 공부해서 에스더처럼 똑똑한 여인이 돼 새 이름을 갖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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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눈이 버들에게 향했다. 버들은 그 얼굴에서 송화 신랑 박석보의 모습을 찾아냈다. 우야꼬, 이를 우짜노. 탄식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사진 뒤엔 분명히 삼십육 세라고 쓰여 있었는데 눈앞의 사람은 환갑도 더 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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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 신랑은 사진 그대로네. 니는 좋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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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고깃국, 김치와 달걀부침이 나왔다. 달걀부침은 한 사람당 한 개였다. 조선에선 생일에도 받지 못했던 진수성찬이었다. 밤새 뒤척이느라 허기졌던 신부들은 입맛이 깔깔해도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고 어젯밤 술기운에 떠들었던 신랑들은 조용했다. 

신부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으면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뱃삯이 있다고 해도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돌아가면 포와로 시집갔따 왔다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한다. 

 

하와이로 오는 동안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자유를 맛보았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신부들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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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는 나라 돌아가는 꼴은 잘 모릅니더."

버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주워들은 일본 이야기를 하면 불호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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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은 시집오면 학교가 앞에 기다리고 있다 문을 열어 줄 줄 알았다. 나무에 옷이며 신발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만큼이나 허황된 기대였다. 

 

신랑과 재미나게 살지도 못하고, 공부도 하지 못하게 된 버들은 친정을 도와주겠다는 꿈만은 지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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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도 다니지 않고 부인회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버들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었따. 사실, 양분된 교민 사회에서 버들은 어느 쪽을 만나도 불편했다. 묵은 정을 생각해 서로 조심하고 있지만 줄리 엄마와의 관계도 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버들은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있고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 생각이 간절했다. 가까운 곳에 살게 됐으니 좀 더 자주 만날 줄 알았던 홍주와는 그뒤 편지를 한 번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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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상점들 간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가 세상을 휩싸고 있었따. 버들의 어깨를 한번 안았다 놓은 태완은 빠르게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안개가 삼킨 것 같은 태완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남편을 부르며 두어 발자국 떼어 놓던 버들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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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 성?"

 

버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지 줄리 엄마가 " 내다, 내 이름이 삼월이다." 했다. 버들은 줄리 엄마와 더 오래 알고 지냈어도 이름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 소리를 듣고 정호가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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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은 우리 사이에 편 가르지 말자던 줄리 엄마를 그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홍주는 일요일 오후마다 세탁소로 와서 성길의 주일학교와 덕삼의 동지회 임원 회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홍주는 온갖 푸념을 늘어놓았다. 버들과 달리 교류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부대끼는 일도 상처받는 일도 많았다. 

 

버들은 와히아와 사람들이 다 자신을 멀리해도 홍주와 개성 아주머니 부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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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남편 떠난 여자, 남편 죽은 여자,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 셋이 모여서 뭐가 좋았다는 거야?"

 

스물세 살, 고작해야 나보다 네 살 더 많은 나이였다. 사 년 뒤 내게 그런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면 맹세컨대 나는 지금 여기서 삶을 멈출 것이다. 

 

"니 혹시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는 내를 말하는 기가?"

 

이모가 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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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를 뽑고 있던 엄마가 돌아다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기미가 가득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마흔한 살인데 예순 살은 돼 보였다. 그 모습에 열여덟 살 버들이 겹쳐 떠올랐다. 엄마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따. 눈앞이 뿌예졌다. 

 

꽃향기가 가득했다. 

 

"누가 내한테도 이쁘고 향기 나는 꽃목걸이 쪼매 걸어 줬으면 싶었다."

 

엄마는 카네이션의 꽃말이 사랑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가. 엄마가 키운 카네이션들은 예쁘고 향기 나는 레이가 돼 누군가를 환영하고, 축하하고, 위로하며 따뜻하게 안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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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까네 니가 마당을 사방팔방 뛰어댕기면 나폴거리는 나비맨키로, 포롱거리는 새맨키로 이뻤다. 남들 앞에서 춤출 때도 그렇고."

 

그 모습을 떠올리는지 엄마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건 가장 펄다운 때였다.

 

"우리 어무이는 왜놈 없는 시상에서 살라꼬 내를 여로 보냈지만 내는 공부시켜 준다 캐서 온 기다. 돌이켜 보면 내는 새 시상 살라꼬 어무이, 동생들 다 버리고 이 먼 데까지 왔으면서 딸은 내 곁에 잡아 둘라 카는 기 사나운 욕심인 기라. 내는 여까지 오는 것만도 벅차게 왔다. 인자는 니가 꿈꾸는 시상 찾아가 내보다 멀리 훨훨 날아가그레이. 그라고 니 이름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그라. 암만 멀리 가도 여가 니 집인 걸 잊어삐리지는 말고."

 

엄마는 나처럼 꿈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로즈 이모가 내 곁에 있어 줘서 행복했다. 그리고 송화가 날 낳아 줘서 고마웠다. 

 

"물 안 주길 잘했구로."

 

우리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하와이에 산다면 이런 비쯤 아무렇지 않게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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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가는 것조차 어려웠던 때 어떻게 머나먼 곳으로 떠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사진 한 장에 자기 운명을 걸게 했던 걸까. 그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낯선 곳에서의 삶은 또 어땠을까. 

 

 

 

버들이 주인공인 듯 싶었지만 3대에 걸친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버들의 가족 이야기였고 버들, 홍주, 송화와 같은 예쁜 소녀들의 이야기였다. 

 

마지막에 버들이 펄에게 한 말은 엄마의 무한한 사랑이 묻어 나는 말이었는데 

폭풍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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