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8-03 개인주의자 선언

2. 취미생활/- 책

by 새치미밍 2018. 4. 23. 13:33

본문

반응형




첫머리에 이런 구질구질한 응석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결국 이런 모든 나의 편향이 내 글에 배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척 논리를 펴도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선호, 자기가 살아온 방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성격조차 타고난 요소, 즉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말해준다. 그 바탕 위에 인간관계, 일, 독서 등을 통해 쌓아온 직간접 경험들이 결국 '나'라는 고유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 생각일 뿐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저 저 별에서 저런 과정을 거쳐 자란 인간들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서로 알게 될 뿐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이 평화로운 공존과 타협의 시작일지 모른다. 저 초록색 외계인들이 내 맘에는 안 들더라도 어차피 잠시 머물며 즐겁게 보내야 할 이 술집에서 서로 오해하고 총질하면 내 손해니 잠시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합의가 있어야 술집이 돌아간다. '다름'은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제발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노력을 해나가자고요."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될 정도로 백인 경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로드니 킹이 그로 인한 LA 폭동 때 평화를 호소하며 했던 말이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시야ㅑ.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인간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 과잉 기대도 말고 과장된 절망도 치우고 서로 그나마 예쁜 구석을 찾아가며 참고 살자 싶다. 큰 기대 않고 보면 예쁜 구석도 꽤 있다. 이건 결국 자기변명이다. 그래야 남들이 나도 참아줄 테니. 어차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살 것도 아니면서 인간의 본질적 한계, 이기심, 위선, 추악함 운운하며 바뀌지도 않을 것들에 대해 하나마나한 소리 하지 말고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존재답게 최소한의 공존의 지혜를 찾아가자. 그게 각자의 행복 극대화에도 최선의 전략일 것이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쓰고 보니 난 여전히 소년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정 많은 휴머니스트보다는 도구적으로 최소한의 도덕을 찾는 현실주의자다. 그게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소수보다 '찌질한' 다수가 많은 것이 현실이기에 그 다수의 하나로서 간증하는 거다.


개인주의자로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 최소한 그들을 참아주기라도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가끔은 내가 양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 자유를 때로는 자제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들과 타협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가.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자기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와 동전의 양면처럼,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는 개인의 이익이 지속가능하지 못하도록 '반대 인센티브(불이익)'을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합리성이기도 하다. 

어차피 정답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갑질'의 심리 역시 수직적 가치관의 사회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수컷 동물 사이의 우세경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는사회가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타인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이어져 약자혐오와 위악적인 공격성을 낳는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모두 같은 현상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땜누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서교수가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행복의 메커니즘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다. 이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옛말의 지혜와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건 심오한 인생철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물체의 기본 메커니즘인 적응adaptation 때문이다.


과학이 알려준 행복은 결국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핵심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수직적 가치관과 경쟁 역시 출세, 권력, 돈, 학벌, 지위재의 과시를 통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의 발현일 것이다. 문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매개체인 돈, 지위 등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위재(Positional Good) : 다른 사람의 눈에 자주 관찰되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지 않은 품목과 손수비게 비교평가될 수 있고 그 가치를 계속해서 상승시키는 재화.


무엇보다 서구 민주주의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기본 전제로 하고, 권력자를 철저히 불신해 권력을 분리하여 상호견제하도록 하는 사고방식 말이다.


결국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세대론보다 모든 생물의 특징인 '적응'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결국 변한 건 세대라기보다 시대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여건하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저성장 시대에 맞는 생존 전략, 행복 전략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소소하지만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비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현명한 방법이다. 문제는 그것이 지속간으한가다.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는 팩트다'라거나 '개취(개인 취향) 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 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코끼리가 훨씬 강력한 엔진이고 합리적인 기수는 보조적인 제어장치 역할을 하도록 진화한 이유는 그게 효율적인 생존장치니까 당연한 일이다. 합리적 추론은 결과적으로 옳을 가능성은 높지만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에 따라 인간은 익숙한 것에 끌리고 새로운 것, 즉 타자를 경꼐한다. 논리 이전에 감성적으로 우리 편이라는 편안함을 주지 않으면 배척장치가 발동한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한다는 옛말은 경험적인 과학인 것이다.


과거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 통계적으로 나쁘지 않다며 현존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대해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 문제 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길거리에서 타살당할 염려 없이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잠들지 않게 서로 깨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북유럽 전역에서 관습법처럼 통용되는 '얀테의 법'이라는 것도 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지 마라, 남보다 더 낫다고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을 비웃지 마라'다.

팔짱 낀 채 '한계' '본질' '구조적인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 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Anyone can be cynical.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Dare to be an optimist. 


우리 사회는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물론 이런 가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실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자들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런 문화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책임자를 결정장애와 도피심리로 몰아넣는 측면이 잇음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영미식의 실용주의 가치관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전제 아래 해야 할 의무를 다 이행했다면 과감하게 면책한다. 결과가 제아무리 중대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지게하는 사회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세상을 먼저 경험한 선배가 주는 실용적인 조언 같다.


작가는 스스로를 '도구적으로 최소한의 도덕을 찾는 현실주의자'라고 말한다. 이는 개인주의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사회계약을 통해 이미 모든 개인은 타인과의 공동체 삶을 위해 자신의 이익 중 일부분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이 말은 지금의 나조차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타인의 손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단에 속한 개인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개인주의자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의 도덕, 즉 타협하는 태도와 타인의 행복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