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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2. 취미생활/- 책

by 새치미밍 2019. 1. 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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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잠에서 깨어나 뜨거운 차를 만들면,

다음 잠에서 깨어날 때 슬픔이 누그러지리라.


"누그러지리라 그게 좋았어. 한밤에 자다가 깼을 때 왠지 서글플 때가 있잖아? 그때 따뜻한 차를 만들어놓으면, 다시 잠에서 깰 때도 덜 슬프다는 게."


인테리어 소품샵 앞에서 구경하던 해원은 충동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래도 연말이 다가오는데 이모와 무엇인가를 축하하고 싶었다. 축하할 일이 없다면, 아무 일이 없다는 걸 축하하면 되니까.


"음 책방 이름이 왜 굿나잇인지 물어보고 싶었어."

"글세 잘 자면 좋으니까. 잘 일어나고 잘 먹고 잘 일하고 쉬고, 그리고 잘 자면 그게 좋은 인생이니까."

"인생이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나? 그 기본적인 것들도 안 돼서 다들 괴로워하는데."


책방을 나서며 그의 옷에 팔을 끼웠다. 크고 헐렁하고, 그의 냄새가 나고, 따뜻했다. 백열등 하나를 품에 넣은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은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해원이 힘차게 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합의의 악수를 하고, 그녀는 도망치듯 그대로 책을 끌어안고 미닫이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기와집 벽에 기대 숨을 돌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싶은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은섭은 해원을 보내고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앉아 방금 그들의 대화를 되돌려보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런 조건 협상도 안 했다. 이런 아마추어들 같으니!


"너, 미술 전공했던가?"

"그런데?"

그가 왜 한 뼘쯤 밝은 표정이 되는지, 눈빛에 설렘이 떠오르는지, 해원은 궁금하게 여겼다. 책방은 따뜻했고 유리문 너머 밤이 내린 겨울 들판이 격자 안에 풍경 사진처럼 들어찼다. 어둠에 잠긴 것들은 어둡고, 반짝이는 것들은 또 반짝여서 저마다 평화로웠다.


책상에 아크릴화가 펼쳐져 잇었다. 아끼는 종류의 화지와 붓, 물감들로 작업은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그림 속 들판은 달 밝은 밤. 책방 간판이 걸린 기와집 미닫이문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기왓장 골마다 눈이 덮이고, 문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는 홀로 봄이라 가느다란 잎이 밤바람에 흔들린다. 스쿠터는 졸면서 벽에 기대 있고, 지붕의 까치 두 마리가 휘영청 달을 올려다보는 그림이었다.

실제로 버드나무는 없었지만 해원은 상상으로 그려 넣었다. 지붕의 눈은 하얗게, 버들잎은 연푸르게 채색해 연하장에 겨울과 봄을 나란히 담고 싶었다.


"버드나무 잎이구나."

희미하게 그의 깊은 곳에서 먼 등댓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그 불빛은 눈동자에도 떠올랐지만 금세 숨겨졌다.


40도는 술이 아니다.

영하 40도는 추위가 아니다.

400킬로미터는 거리도 아니다. -러시아 속담


그리고 40세는 나이도 아니다. -배근상


어느새 아랫집에서 나온 이장님이 입을 쩍 벌리며 한탄했다. 옆에서 은섭도 말문이 막힌 채 호두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구경꾼들을 향하는데, 손에 든 가스 토치가 무슨 설원의 권총처럼 보였다. 


그가 뒷정리하는 모습을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서서히 걱정이 옅어졌다. 괜히 예민해져 그랬을 뿐 모든 게 그저 한파로 인한 해프팅이고, 시간이 지나면 웃게 될 일인 듯한 낙천적인 기분이 찾아왔다. 혼자 있지 않아도 되는 이 밤이 고맙고, 애인이나 가족이 아니어도 좋은 누군가와 한 지붕 아래 같이 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풀어졌다.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따. 당황스런 속마음이 표정에 비쳤는지, 은섭이 묻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옥상에서 수도관이 터지는 참사가 일어났고 솔직히 말하면 겨울 햇살이 비칠 때는 얼음이 뒤덮인 이층집이 기이하게 아름답기도 하다. 호러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나 할까. 마당은 눈과 얼음 범벅이고 집채는 껍질을 마구 벗기려다 고사된 나무둥치처럼 가련한 몰골이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굿나잇클럽 여러분.


순간 행복해진 나는, 불현듯 덜컥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불꽃같이 고백하기를….


…같은 멍청한 말로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고마워, 라고만.

그럼에도 변치 않는 건 오늘 밤 H가 이 시골집 건넌방에 곤히 잠들어 있다는 것. 내게는 그것이 겨울 한파가 몰고 온 전설같은 이야기라는 것.

창밖은 폭설로 하얗기만 합니다, 로저.


곁에서 은섭이 무엇인가 내밀어서 쳐다보니 이어폰 한쪽이었다. 해원이 귀에 꽂자 그도 나머지 한쪽을 꽂고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틀었다.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소리. 처음 듣는 밴드의 노래가 그녀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다정한 멜로디는 편안했고,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음악 속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걸 바라보는 시간이 휴식 같았다.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으러 떠났는데 아무리 다녀도 없고, 집에 돌아오니까 새장 속에 파랑새가 있더라 하는 거. 말도 안 돼. 늘 내 곁에 잇었는데 내가 몰랐을 뿐이라니, 그랬을리가 없어. 그것도 모를 만큼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야."

말하다 보니 약간 서글펐다.

"파랑새는 먼 곳에 있어. 찾으러 가든 안 가든 자유지만, 파랑새가 처음부터 곁에 있었다고 나 자신을 속이긴 싫어."


# 지도에 관한 판타지

인간은 지도를 바라보는 판타지가 있다. 꼭 보물섬을 찾아 가는 여정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내가 꿈꾸던 완벽한 장소와 대상이 존재할 것만 같은 절실하고 아름다운 오해가 있다. 팔십 세 노인이 바이로이트로 떠났던 거나 샹들리에를 찾아 저자가 오래 여행한 것도 결국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여정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허먼 멜빌의 문장도 기록해둔다.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진짜 장소들은 대부분 그렇다. -멜빌


그는 평생 진짜 사람을 알아볼 늑대 눈썹을 얻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말과 표정이 일치하지 않으니까, 말을 듣지 말고 표정을 읽어야 한다'고 그는 자주 되뇌었다. 하지만 그 역시 절반만 옳았다. 사람들은 표정 또한 자유롭게 바꾸고 지어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애초에 읽으려 들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보여주는 걸 보고, 들려주는 걸 들으며, 흘려보내면 그만.


그의 사랑은… 눈송이 같을 거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하나 둘 흩날려 떨어질 땐 아무런 무게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지붕을 무너뜨리듯 빠져나오기 힘든 부피로 다가올 것만 같다고.


"뭐가 그래서야. 새벽 기차가 멈춘 곳에 해원이가 서 있었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안 반해."


"연애가 나쁜 게 아니고요, 뭐랄까 저 사람들은 고독이 필요해서 온 거거든요? 딱 보면 그렇잖아요. 저는 알 것 같던데."

해원이 되물었다.

"그래 보였어? 고독이 필요한 사람들처럼?"

"네. 사랑- 그거 별거 아니에요."


그림이 벽에 걸린 것은 어느 해 장마철이었다. 그녀는 침대 윗벽에 못을 박고, 액자를 걸었다. 비스듬히 걸렷을까봐 몇 발자국 물러나 수평도 가늠해보았다. 그림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침실의 풍경 속으로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녀는 그림을 한참씩 들여다보곤 했다. 거기엔 마을이 있고, 좁은 길과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자랐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작은 집이 있었다. 창문은 나뭇가지에 가려졌지만 겨울에 잎이 떨어지면 집 안이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나 겨울이 온다면.

그러나 마을은 늘 한여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여자는 그림에 흥미를 잃었다. 그녀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무심히 잠들었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한 번도 액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곳에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의 마을에는 늘 비가 내렸다. 날씨가 좋아지면 강을 건너 그녀를 만나러 가겠다고 몇 년째 생각한다. 마을을 고립시킨 강물에 다리가 놓이면, 부서진 나룻배를 고칠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오두막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러나 그는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비는 그치지 않고 강물은 늘 그곳에, 나룻배는 홀로 물결에 흔들리며 삭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잊었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야. 농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게 제일 두려워.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농담이 안 나와서 그래. 너를 웃겨줄 말이 생각이 안 나서."


# 오늘의 부피

오랫동안 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오늘 날짜의 부피가 생긴다. 6년 전 오늘. 3년 전 오늘. 작년과 올해의 오늘. 겹겹이 층이 쌓이는 페이스트리 빵처럼 그 속에 기억과 장면들이 깃든다. 언젠가부터 겨울이 오면 H가 내려왔고, 그녀를 모른 척 바라보고, 가끔 서로 말을 나누고, 나는 겨울마다 어떤 날짜들의 부피를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포개지는 일상들은 딱히 달라질 것이 없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다 올겨울 그녀가 내게 다가왔을 때,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 날짜들은 더 이상 균일한 평안함으로 쌓이지 않고, 오늘의 부피는 이전과는 달라졌다. 내년부터는 겨울이 와도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가올 겨울의 부피.





책 중반부에 은섭은 영국에 사는 여든 살 노인이 평생 간직해온 관광안내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며 해원에게 이야기를 한다. 안내서를 따라갔지만 노인은 숲에서 길을 잃게 되는데, 그 안내서는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행된 백 년 된 안내서였다. 기사 제목은 아름다운 바이로이트. 은섭은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울 뻔했다고 말한다.


"가슴 아프잖아. 평생 가보고 싶다고 꿈꾸던 곳에 드디어 찾아갔는데, 수없이 들여다본 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거."


은섭은 해원과 이별을 앞두고 일지를 쓴다.


'한때는 살아가는 일이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평화롭게 안착할 세상의 어느 한 지점. 내가 단추라면 딸깍 하고 끼워질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어쩌면 거부당하지 않을 곳.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라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하나의 공간과 위치가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제자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가끔은, 그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그런 곳을 꿈꿨지만 현재 존재하는 내 자리가 그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언젠가 버려지고 혼자 남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은섭과 해원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각자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명여 이모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다'는 말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기약 없는 말과 같다고 했다.

해원이 보영에게 연락한 것처럼, 혜천을 떠나기 전에 은섭을 만나러 밤중 산에 올라간 것처럼 날씨가 좋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날씨 좋은 날을 만들며 살아가고 싶다.


겨울처럼 청량하지만 봄처럼 따뜻하기도 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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